[악의 결사 비밀기지] 하면 딱 떠오르는 물건 없습니까.

예, 바로 요 녀석 말입니다.
[악의 결사와의 기나긴 싸움 끝에 마침내 대반격에 나선 주인공들은 적의 기지로 돌입, 그리고 싸움에 패한 악의 결사의 두목은 마지막에 기지의 자폭장치를 눌러서 주인공들을 마지막 위기로 몰아넣는다.] 라는 황금 패턴은 시리어스로도 개그로도 언제나 유효한 클리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제로 지금까지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숱한 악의 결사들 중 실제로 기지에 자폭버튼을 탑재했던 녀석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자폭버튼은 악의 결사 비밀기지의 아이콘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근데 이 자폭스위치란 녀석이 은근히 번거롭습니다.
인터넷하다 컴퓨터가 해킹당하거나 바이러스라도 먹는 날엔 기지가 무슨꼴 날지 모를 일입니다.
기지 메인 컴퓨터로 인터넷 안하면 그만인가 하면, 디스크나 USB로도 바이러스는 옮겨다니죠. 어쨌든 정보 업데이트는 꾸준히 해야 세계정복사업을 하잖습니까.
그런거 아니라도 그 거창한 기지를 관제하는 컴퓨터쯤 되고보면 구축되어있는 시스템이 장난이 아닐겁니다만, 시스템 어디엔가 기지 전체를 말아먹을 자폭프로그램이 있는 한 사소한 버그 하나라도 참담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가능성은 결국 이 자폭시스템은 다른 모든 시스템과 완전히 독립되어있으며, 웬만하면 버그가 나지 않을 상당히 단순한 구조 - 어쩌면 아날로그적인 메커니즘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보기엔 이래도 열어보면 꽤 유행 지난 구조를 하고 있을거란 얘긴데...
방대한 기지를 제어하기 위해 기지 전체의 구석까지 배선 까는것도 참 눈물겨운 작업이었을텐데 거기다 완전히 독립적으로 버튼 하나에 연동되는 자폭 시스템까지 기지 곳곳에 따로 배선할려면 얼마나 시간과 돈이 들어갔을지.. 심지어 그 생고생의 대가는 기지를 말아먹는 자폭장치입니다.

그럴거면 이 양반한테도 조금만 시간과 돈을 줘보라고
그 과감한 수고를 들여서 지는 상황을 상정한 물귀신 작전용 장치를 만드는데 그 수고를 기울이다니, 마치 처음부터 이길 생각이 없는것 같은 행동입니다.
이 양반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장대한 삽질을 하는 걸까요.
예, 생각할 수 있는 답은 역시 '처음부터 이길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하면, 결국 그들이 하고 싶은 건 '세계정복 활동' 이지 '세계정복' 이 아니란거죠.
'세계정복' 이라고 하면 참 강자의 입장에 선 오만방자한 선언 같지만 이게 뒤집어 말하면 '난 나의 꿈을 위해 세계 전체와 싸우겠다!' 라는 청춘로맨스틱한 꿈과 낭만이 가득한 소리잖습니까.
언제나 악의 조직은 대단한 자본과 기술, 병력을 가지고도 웬지 한심한 운영방침으로 번번히 패배의 쓴잔을 마시곤 합니다.
그래서 '이런 돌머리로 무슨 얼어죽을 세계정복이냐' 등의 혹평을 받고있긴 합니다만, 그 정도 규모의 자본과 병력을 갖추고 독자적인 기술을 보유했을 정도의 인물/단체가 실제로 그렇게 무능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보면 그 한심한 운영방식이란 게 '한 놈만 보냈다가 당한다' '사이 나쁜 녀석끼리 보내서 내분으로 패한다' 처럼 국지적이고 - 조직 전체로 봐선 미미한 손실에 그치는 소극적인 작전이란 말이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조금만 제대로 하면 주인공들 발라버리는 건 일도 아니고 세계를 정복하는 것도 허망한 꿈은 아닐텐데 왜 이런 삽질의 러닝머신위에서 무한궤도 조깅을 하는걸까요?
역으로 '정복하면 그 다음은?' 이란 걸 생각해봅시다.
다스린다 -> 치세 -> 정치

예, 이거요.
고생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영화는 함께 누릴 수 없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어쨌든 우정, 노력, 승리끝에 얻어진 세계정복의 열매 뒤에 기다리고 있는 건 서류와의 싸움, 그리고 어제의 동료들과의 이권다툼.. 이건 지금까지와는 다른 비릿한 싸움인겁니다.
거대한 적을 상대로 일개 조직으로 싸울 때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죠.
사원모집 광고에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함께 열정을 불사를 분을 찾습니다' 라고 하면 '가축적인 분위기에서 무한노동착취 당할 분 찾습니다' 로 독해가 되는데요, 이건 역으로 말하면 공통체의식이 투철한 환경에선 무리한 제반사정도 꽤 견딜만하단 얘깁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모두가 하나되어 한가지 목표를 향해 노력.. 이란 게 의외로 재미도 있고 뭔가 보람도 있는것같단 말이죠.

외부에 강력한 적을 두고 꿈을 향해 달릴 때는 3800km를 도보로 대장정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겁니다.
비밀기지 짓고 막대한 인원을 모을 정도로 돈도 있고 시간도 있고 하다는 거.. 그렇게 될 때까지 인생을 워커홀릭으로 보냈단 얘기겠죠.
경쟁사회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젊은 날의 꿈도 가슴 속에 뭍어두고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려온 인생, 어느덧 돌아보니 주위엔 아무도 없고 산해진미도 고대광실도 참 덧없기만 한겁니다.

개인 항공모함을 굴릴 돈에 강철같은 육체가 있어도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것 같은 허무함은 견딜수 없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젊은 날 남겨두고 온 꿈을 향해 다시 손을 뻗는겁니다.
돈도 있겠다. 힘도 있겠다. 자본주의란 이름의 링에서 챔피언이 될 정도로 백전연마된 수완도 있겠다.. 그럼 세계와 싸움 한판 떠서 식어버린 열정에 불을 지펴보는 겁니다.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한 줄기 꿈을 마음의 지지대로 삼아 동료들과 싸움의 나날을 헤쳐나간다..
어쩐지 가슴속의 자기 미화 중2병 필터가 발동하면 
이런 그림이 딱 떠오르는 것이.. 단순히 중2병이라고 마냥 매도하기엔 아까운 꿈이잖습니까.
근데 문제는, 그러다 진짜 이기기라도 하면
이거란 말이죠.
그런데 세계정복 활동이 끝나기 전까지는


이거고요.
그러니 의외로 이 악의 조직 총수들의 세계정복 활동은 계속되는 싸움의 나날이라는 과정 자체가 목적인 겁니다.
질리면 벌여뒀던 일 뒷감당은 어떻게 할거냐고요?
거기서 등장하는 게

이겁니다.
결정적인 빈틈을 보여서 주인공일당에게 조직이 파멸당할 건수를 제공한 다음 화려한 산화로 마무리!
뒤늦게 불사른 열정으로 세상을 뒤흔든 양반다운 '내 인생 한점 후회는 없다' 의 폼생폼사 결말!
오늘도 그렇게 개인의 도락으로 세계를 뒤흔든 풍운아 하나가 빨간 단추 하나로 로망을 완성하며 별이 되어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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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말고도 '폼나는 퇴장' 을 위해서 자폭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죠.
주인공은 보스를 쓰러뜨리기 위해 '칠전팔기', 아니 그 이상으로 덤비는데 비해
보스는 '한판만 져도' 바로 자폭을 선택합니다. 그러고는 다음작에 언제 그랬냐는듯이 다시 등장하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거나 잡혀들어가느니 자폭을 선택하는 것 같더군요.
어쩐지 설득력있어요.
그러고보면 정치는 어지간한 악당도 피할정도로 더러운거군요. -_-;b
설득력 있는 글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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